하루 한 편 영화/영화 비평

그 어디에도 있는 '타이페이'- 양덕창의 <타이페이 스토리>

익명의 동물들 2019. 11. 18. 17:36

도시 삶에서의 고독을 말하는 작품은 너무나 흔해서 사람들에게 색다른 게 다가오지 않는다. 어쩌면 이 영화도 누군가가 보기에는 일상에 널리고 널린 현대인의 이야기라고 말할 것이다. 에드워드 양이라고 알려진 이 감독을 나는 양덕창이라고 부른다. 그 시작은 중국영화 수업에서 선생님이 이렇게 부르신 연유에도 있지만 '에드워드'라는 미국 이름보다 '덕창'이라는 옆집 아저씨같은 이름이 더 편하기 때문이다. 이 아저씨는 바삐 돌아가는 현대 인간들의 발목을 붙잡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발을 쉴새없이 움직이다가 멈춰섰을 때를 기다려준다. 양덕창의 덕목이라면 '기다리고 바라보기'이다. 이 세태의 흐름과 시간 속도에 맞지 않는 그의 연출이지만 그럼에도 지루하지 않는 이유는 그 기다림과 시선에는 사람이 있고 공간의 공기가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고백한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중간 넘어가는 지점에서 잠시 졸았다.

그래서 오토바이남의 등장에 다소 당황했다. 어디서 등장한 인물인지 맥을 놓쳤으니까.

2차 관람에서는 졸지 않았을 뿐더러 재미있어서 졸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영화는 기승전결을 따르기 때문에 초반 20%만 보고 엔딩만 봐도 어느 정도 내용이 파악된다.

하지만 양덕창의 영화는 내 경험처럼 잠시 놓치면 감정선과 내용 파악에 다소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플롯이 안 짜여진 영화처럼 보이지만 엄청 촘촘하게 거미줄처럼 짜여있는 영화이다.

흔히 좋은 이야기를 '물 흐르듯' 흘러간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의 영화는 사람이 눈으로 보거나 만질 수 없는 '공기'의 흐름을 따라간다.

 

많은 사람들이 양덕창을 시대의 공기(분위기)를 잘 담는 감독으로 평한다. 그러나 나는 그 공기라는 것이 분위기가 아닌 '숨결'이라고 말하고 싶다. '숨'은 생명체만이 내뿜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무생물도 숨을 들일 수 있고 뿜을 수 있다. 가령 콘크리트 건물의 온도가 사시사철 다르게 변하고, 건물의 균열을 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양덕창 영화의 '숨결'이라는 것은 인물과의 호흡, 소품과의 호흡, 공간과의 호흡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방적으로 공기(분위기)를 보여주는 게 아닌 들숨과 날숨을 오가면서 관객과 함께 호흡한다.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양덕창의 장점은 어둡고 깜깜한 곳에서 단 하나의 빛에 의지하는 관객이 외롭지 않게 같이 숨을 내쉰다. 그리고 이 숨결은 영화 자체를 살아 생동하게 한다.

 

오프닝에서 시작된 빈집이 어느 순간 채워졌지만 아룽과 수첸의 관계는 좀처럼 충만하지 않다. 기실 이 둘의 관계는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텅 비어있었다. 두 인물이 같이 나오는 컷은 몇 컷 되지 않고 나뉘어진 방에서 각각 자신의 꿈에 빠져있다. 아룽은 야구 자세를 취하고 수첸은 인테리어 구상을 말하기 바쁘다. 두 사람이 대화를 하긴 하지만 상투적인 호응일 뿐이다.

 

영화는 개인의 고독과 무기력, 인간관계 단절, 소외와 외로움의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아룽이 도쿄에 들른 걸 안 수첸은 동생이 어울리는 길거리 청년들과 어울려보지만 불안한 감정이 일시적으로 해결된 것일 뿐이다. 이는 영화 엔딩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잠시 기다려달라는 아룽의 말에 택시기사는 자기는 휘말리고 싶지 않다는 식으로 무심하게 말하고 아룽도 체념한 듯 기사에게 돈을 건네주며 차에서 내린다. 또한 아룽을 구급차에 실은 의사는 경찰과 웃으며 이야기를 할 뿐 한 인간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는다. 메이 사장이 새 사무실을 차린다고 기분이 들 떠 있을 때 수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듣고만 있고 창밖을 바라보다 선글라스를 끼며 시선을 차단한다. 이렇듯 이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연결이나 유대를 갖기 보다 조각조각 분열되어있다.

 

영화 속 타이페이란 도시에는 막대한 미국과 일본 자본이 유입되고 있으며 회사가 없어지고 직원이 잘리기도 한다. 일본 식민지를 60여년 간 겪은 대만은 다시 일본의 속국이 되는 위기에 처해있다. 도시 한복판에 우뚝 선 거대하고 화려한 전광판의 네온사인에는 일본 후지필름의 광고가 불을 밝히고 있다. 대만인 남성인 아룽과 일본인 남성인 고바야시와의 저울질에서 후자를 택한 여성이 나온다. 그는 고액의 연봉을 받는 고바야시를 선택했지만 이혼을 하고 잠시 친정에 들른다. 친정아버지는 그의 자녀에게 일본어로 말을 걸며 기뻐한다(영화 안에 적어도 3가지 언어가 나오는데 이 점에 주의해서 봐도 흥미로울 듯 하다). 미국 회사의 지부를 마련한 메이 사장은 굳이 미국으로 갈 필요가 없이 회사를 가져오면 된다, 여기가 미국이라는 말은 한다. 일본과 미국의 대자본에 휩쓸려 대만은 정체성이 흔들린 것이다.

 

인물들이 가지는 불안도 자본과 뗄 수 없다. 돈에 전전긍긍하는 수첸의 아버지, 회사가 인수합병되자 직장을 잃은 수첸, 야구선수의 꿈을 가졌지만 작은 회사를 운영하는 아룽, 특별한 직장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는 수첸의 동생 등등 자본(돈)에서 자유로운 이는 그 누구도 없다. 경제 성장이라는 빌미로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 거대 자본의 파도 속에 따라 인물들도 휘말리게 된다. 물질적인 곤란함은 정신적인 불안정과 불안으로 이어진다(전통적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보면).

 

따라서 이 작품이 '타이페이 스토리', 타이페이 이야기인 것 같지만 실상 자본을 가진 거대 기업이 침투해있는 여러 나라의 사회와 인간 군상에도 적용할 수 있다. 타이페이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여도 이 영화에 공감할 수 있는 점은 타이페이'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구에 산재했는 도시들이 '타이페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19년 11월 18일 월요일

 

배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