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와 나의 교차점을 찾아서
솔직한 고백.
<벌새>를 처음 봤을 때 너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작년 부산국제영화제부터 입소문이 자자했던 영화는 내 기대와는 달리
영화는 잘 만들었으나 심정적 동화가 쉬이 되지 않았다.
'내가 영화를 잘 못 보는 것인가?', '주변에 봤던 다른 사람들도 다 좋다고 하던데 나만 이상한 것일까?'
같이 블로그를 쓰는 헌이비와 이다지는 '모르면 모르는대로 둬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너무나도 알고 싶었다. 이 영화에 대해. 마치 은희가 세상을 알고 싶어했던 것처럼.
선뜻 적극적으로 내키지는 않았어도 다시 봤다.
처음에도 온전히 이 영화를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러나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 답을 향한 탐색.
은희와 나는 180도 다른 사람이다. 하기야 영화에서 나와 유전자가 일치하는 캐릭터가 얼마나 있겠는가.
그럼에도 좀처럼 나와 공통분모를 찾기 어려운 캐릭터임은 부정할 수 없다.
우선 아버지부터 너무 다르다.
가부장적이고 식탁에서 명문대 진학만 이야기하는, 오직 자식에게 자기 욕망을 투영하는 아빠.
자식 앞에서 쌍욕을 거침없이 하고 내가 너희를 위해 이만큼 희생한다며 생색을 내는
그리고 바람도 피며 일끝나서 모두 힘들어도 돈을 셀 때 혼자 드러누워서 자는
그 캐릭터가 현실에도 있다는 사실이 '이거 실화냐?'라는 유행어처럼 믿기지가 않았다.
그러나 엄마를 때리지 않고 은희의 뺨을 때린 은희오빠를 나무라는 모습을 보면
적어도 물리적 폭력을 행하지 않아서 <똥파리>의 아빠는 아니라고 안도해야할까.
나의 아버지가 개방적이고 자유방임적인 교육을 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전혀 권위적이지 않거나 가부장적이지 않은 건 아니다.
가부장제가 공고한 한국 사회에서 남성이 그 영향을 받지 않은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나는 세상 남자가 다 내 아버지 같은 줄 알았다. 어쩌면 은희 아버지가 더 흔한 편일 거라는 추측을 해본다.
그렇지만 아버지 캐릭터가 엄청난 장벽이었던 건 아니다.
기실 본질적인 원인은 은희가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나의 그것과 매우 달랐다는 것이다.
내가 느낀 은희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리고 포스터에 적힌 문구처럼 '세상을 궁금'해 한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존재가치와 자기방어가 더 중요한, 자의식 과잉이 심한 나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나'이다.
은희가 자기자신을 소홀해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 사이에서의 자아, 세상 안에서의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을 보였다면
나는 주변 상황이 어떻든 나만 괜찮으면 된다, 나만 있으면 된다는 자아 중심적인 성격이다.
따라서 은희가 지숙이랑 화해하고 잘지내는 것도 나로서는 이해가 안되는 게 당연했다.
은희도 인간 관계에서 방어하고 거부한다. 남자친구와의 관계가 그것이다.
그렇지만 은희는 기회를 여러 번 주는 것에 반해 나는 아마도 처음 헤어진 거기에서 끝났을 것이다.
은희가 '세상이 왜 이럴까?' 고민할 때 나는 '세상은 왜 나를 이해 못하는 거야?'라는 자기연민을 하였고
어느새 성격으로 내착화된 이런 자아가 타인과, 세상과 소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떤 시나리오 선생님이 7년전 나를 처음 봤을 당시에는 도그마가 굉장히 강했다고 최근에 말씀하셨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그게 무너진 것 같아서 잘 극복한 것 같다는 말씀도 하셨다.
여전히 사람이나 외부 세계와의 매끄럽지 않은 소통을 하고 있고 계속 내 세계를 여는 과정에 있다.
아마도 평생 이 과정을 겪으며 또 다른 나만의 세계를 구축해갈 것이다.
은희가 나보다 유연했던 점은 이해되지 않아도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관심을 가졌던 자세이다.
그럼에도 은희에게도, 나에게도 이 세상은 여전히 '신기하고 이상한' 일로 뒤섞여있다.
요즘은 '왜 살지?'라는 질문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지만
어느 쪽이든 답이 쉽게 나오지 않는 게 인생이고, 사람이고, 이 세계이다.
2019년 11월 20일 수요일
배정식